墨談齋

면(面)의 존재론

· 墨談齋

르네 지라르를 읽다가 피터 틸이 떠올랐다.

틸은 카테콘이라는 개념을 즐겨 쓴다. 그리스어로 ‘억제하는 자’. 성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쓴 단어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고 있으나, 억제하는 자가 있어 그것을 막는다는 것. 틸은 이것을 전체주의적 세계 정부를 막는 힘으로 해석한다. 분산된 권력, 경쟁하는 국가들, 해소되지 않은 긴장. 그것이 카테콘이라고.

그런데 그 개념에는 균열이 있다.

억제자라는 말은 일방적이다. 강한 쪽이 약한 쪽을 누르는 구도를 전제한다. 카테콘이 사라지면 악이 드러난다는 구조도, 결국 카테콘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서사다. 선한 억제자 대 악한 적그리스도. 그것은 지라르가 비판했던 바로 그 희생양 서사의 변형처럼 보인다 — 이번엔 희생양 대신 구원자가 주인공이 됐을 뿐.

지라르의 모방이론은 다른 곳을 가리킨다.

지라르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자발적이지 않다. 우리는 타인이 원하기 때문에 원한다. 욕망은 항상 삼각형이다 — 주체, 모델, 대상. 모델과 주체가 같은 공간에 들어오면 모방은 경쟁이 되고, 경쟁은 폭력이 된다. 공동체가 그 폭력을 임의의 희생양에게 집중시킬 때,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온다. 이것이 모든 희생 의례의 기원이다.

복음서가 그 메커니즘을 폭로한 이후, 희생양은 더 이상 완전히 작동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무고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단 폭력을 행사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폭력을 해소하던 안전밸브가 제거된 자리에, 핵무기와 인공지능이 들어왔다. 이것이 지라르가 말한 종말론적 위기다.

여기서 에반게리온이 떠오른다.

에반게리온에는 AT필드라는 개념이 나온다. 절대공포의 장벽. 모든 존재가 가진 경계면이다. 그 면이 있기 때문에 내가 나이고, 네가 너다. AT필드는 양면이다. 이쪽이 자아라면, 저쪽에는 반드시 타자가 있어야 한다. 면은 혼자 존재할 수 없다. 타자가 있기 때문에 면이 생기고, 면이 있기 때문에 자아가 생긴다. 자아는 관계의 결과물이지, 출발점이 아니다.

그렇다면 카테콘은 억제자가 아니다.

카테콘은 두 면이 맞닿아 긴장을 보존하는 상태 그 자체다. 압축 응력과 인장 응력이 균형을 이루어 구조물을 지탱하듯, 두 존재가 서로의 경계를 밀면서 동시에 서로를 유지시킨다. 내가 너의 카테콘이고, 네가 나의 카테콘이다. 억제는 일방이 아니라 상호적이다. 지라르가 다극 질서를 지지한 것도 그 이유다 — 미국과 중국, 크고 작은 국가들이 서로를 모방하면서 경쟁하되, 어느 하나가 나머지를 삼키지 않는 상태. 면들이 살아있는 세계.

파국은 두 방향에서 온다. 면이 녹는 것 — 모방 경쟁이 격화되어 자타가 서로 닮아가다 경계 자체가 사라지는 상태. 그리고 면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 — 한쪽이 상대를 완전히 흡수해버려 맞닿을 타자 자체가 없어지는 상태. 전자는 둘이 녹아 하나가 되는 파국이고, 후자는 하나가 나머지를 삼켜버리는 파국이다. 경로는 다르지만 결말은 같다. 면의 소멸.

여기서 틸로 돌아온다.

틸의 논리는 이렇다. 지금 세계는 이미 균형이 깨졌다. 중국, AI, 핵, 테러 — 이 힘들이 이미 5:5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면이 이미 비대칭으로 기울고 있는데 균형을 말하는 것은 이상론 아닌가. 틸은 한 발 더 나간다 — 욕을 먹어도 좋다, 희생양이 되어도 좋다, 십자가를 지겠다. 미국이라는 자아를 지키겠다.

이 논리 안에서 틸은 일관된다. 그리고 진심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라르가 가장 경계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참여자 모두가 진심일 때 가장 강력하게 작동한다. 희생양을 지목하는 사람은 정말로 그가 위기를 일으켰다고 믿는다. 구원자를 자처하는 사람도 정말로 공동체를 구한다고 믿는다. 진심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다. 구조가 문제다.

예수도 십자가를 졌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가 지라르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 예수는 이기려고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정 자아를 보존하려 한 게 아니었다. 희생양 메커니즘 자체를 폭로하고 끝내려 했다. 틸의 십자가에는 목적이 있다. 미국을 살리겠다는 목적이 있는 순간, 그것은 희생이 아니라 전략이다. 그리고 그 전략은 다른 면들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만 완성된다.

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틸의 정의대로라면 적그리스도는 “종말을 끊임없이 경고하면서 권력을 요구하는 자"다. 그런데 틸 자신이 정확히 그렇게 하고 있다. 지라르의 언어로, 지라르가 경계한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결국 적그리스도인지 구원자인지는 결과로만 알 수 있다. 미국이 살아남으면 틸이 카테콘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틸이 또 다른 파국의 원인이 된다. 이것은 마키아벨리적 구조다 — 군주는 결과로 심판받는다. 그런데 지라르가 정확히 이것을 경계했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다. 희생양은 유죄로 기록되고, 구원자의 폭력은 정당화된다. 결과로 판단하자는 말은 — 이긴 자가 옳다는 말과 구조가 같다.

카테콘을 억제자로 읽는 것보다 면(面)으로 읽는 것이 더 정직하다. 면이 있어야 접촉이 있고, 접촉이 있어야 긴장이 있고, 긴장이 있어야 무언가가 존재한다. 카테콘은 주인공이 없는 구조다. 아무도 억제자가 아니고, 모두가 서로의 경계다.

지금 세계는 면이 녹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가 나머지를 삼키고 있는가. 그리고 그 판단을 내리는 자가 누구인지가 — 어쩌면 그 질문보다 더 중요하다.


이 글을 두 사람의 대화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