墨談齋

일론 머스크와 OpenAI의 신화적 구조

· 墨談齋

융의 저작에 푸에르 에테르누스(puer aeternus)와 세넥스(senex)라는 두 원형이 나온다. 푸에르는 이상을 믿는 자다. 세넥스는 구조를 읽는 자다. 두 원형은 한 사람 안에서 충돌하기도 하고, 여러 사람 사이에서 극화되기도 한다. 2015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회의실은 이 극화가 가장 선명하게 벌어진 현대의 무대였다.

그 방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인공지능이 인류의 마지막 발명품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소수 기업이 AGI를 독점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비영리와 오픈소스를 해결책으로 제시했으며, 1억 달러를 내놓았다. 다른 두 사람은 그의 말을 경청했다. 한쪽은 스탠포드에서 르네 지라르에게 직접 배운 투자자였고, 다른 한쪽은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를 운영하던 자본 게임의 숙련자였다. 세 사람이 세운 조직이 OpenAI다.

창립 폭력

지라르는 공동체의 시작에 반드시 폭력이 있다고 썼다. 모두가 공유하는 이상이 하나 선언되어야 집단이 결성된다. 그 이상을 가장 순수하게 믿는 자가 필요하다. 그의 자본과 평판이 판을 연다. 공동체가 임계점을 지나면 그는 밖으로 밀려난다. 희생양 없이는 제도가 태어나지 않는다.

2018년 2월, 머스크는 OpenAI 이사회에서 나왔다. 공식 사유는 이해상충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내막은 그가 회사를 통째로 인수하려다 거부당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1년 뒤 영리 자회사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 마이크로소프트가 10억 달러를 투자했다. 시간표는 우연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정연했다. 남은 두 사람은 상업화 일정을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머스크가 선이고 남은 두 사람이 악이라는 도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머스크가 순수한 이상을 외치지 않았다면 판이 열리지 않았을 것이고, 남은 두 사람이 현실적 계산을 하지 않았다면 조직이 유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푸에르와 세넥스는 둘 다 필요하다. 문제는 둘이 같은 방을 쓸 때 어느 쪽이 먼저 지치는지, 그리고 누가 먼저 밀려나는지가 구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리의 논리

지라르가 공동체의 폭력을 말했다면, 조선의 이제마는 개인의 자리를 말했다. 격치고에서 그는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자리에 놓이면 박통(博通)으로 나아가고, 다른 자리에 놓이면 비박탐나(鄙薄貪懦)로 기운다고 썼다. 인간은 본성이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자리에 의해 기울어진다.

2015년의 세 사람도 각자의 자리에 있었다. 큰 뜻을 외치던 자는 그 자리에서 순진함을 완성했다. 말없이 듣던 자들은 그 자리에서 냉정을 관철했다. 셋 다 제 기질을 배반하지 않았다. 세넥스가 푸에르를 속였다고 말하는 것은 사후의 해석이다. 구조적으로 보면 푸에르는 속을 수 있는 자리에 먼저 들어갔고, 세넥스는 읽을 수 있는 자리에 이미 있었다.

푸에르가 다치는 이유는 그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순수한 이상을 선언하는 자의 자리 자체가 배제되기 쉬운 자리이기 때문이다. 어떤 공동체도 자기 이상을 문자 그대로 실현하지 않는다. 이상은 집단이 모이게 하는 장치이지, 운영되는 실체가 아니다. 푸에르는 이 간극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자다.

여운

2022년 이후 머스크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오픈에서 폐쇄로, 협력에서 전투로. 그러나 한 겹 벗기면 그는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이상을 믿던 자가 이상이 배신당했다고 느낀 뒤 분노하는 것. 푸에르는 상처받아도 세넥스가 되지 않는다. 다만 화난 푸에르가 된다.

이것이 한 기업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학으로 읽히는 이유는, 우리 각자가 어느 시점에는 그 회의실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본을 내놓으며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던 순간. 그리고 많은 경우 조용히 밀려나던 순간. 밀려난 뒤에야 누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푸에르가 세넥스가 되는 길은 있는가. 아니면 푸에르는 다만 화난 푸에르가 될 뿐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이, 아마도 어른이 된다는 것의 내용일 것이다.


이 글을 2편과 함께 두 사람의 대화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