墨談齋

이름이 돌아온다

· 墨談齋

오래된 책에는 누가 베꼈는가가 적혀 있다.

필사의 시대에 텍스트는 손에서 손으로 옮겨졌고, 옮기는 동안 조금씩 어긋났다. 한 글자가 빠지고, 한 줄이 겹치고, 주석이 본문으로 기어들어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었다. 이 판본은 누구의 손을 거쳤는가. 어느 사본이 원본에 가까운가. 서지학과 교감학은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텍스트의 권위는 내용만이 아니라 계보에서 나왔다. 누가 썼고 누가 옮겼는지를 모르는 글은, 옳더라도 무게를 갖지 못했다.

인터넷은 그 위계를 무너뜨리겠다고 했다. 출처도 계보도 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발화하는 공간. 이름을 지우면 글만 남고, 글만 남으면 내용으로만 평가받는다. 익명 게시판의 한 줄이 교수의 논문보다 정확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약속이었고, 한동안 그 약속은 지켜지는 듯 보였다. 검색 엔진은 누가 썼는지 거의 묻지 않았다. 링크가 많이 걸린 글, 키워드가 맞는 글이 위로 올라왔다. 권위는 구조였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익명의 평등은 다른 것도 함께 풀어놓았다. 출처를 묻지 않는 공간에서는 옳은 말과 지어낸 말이 같은 표정으로 떠다닌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문장은 가볍게 퍼지고, 가볍기 때문에 더 멀리 간다. 계보를 지운 자리에 빈자리가 생겼고,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은 평등이 아니라 소음이었다. 무게가 사라진 말들의 바다에서, 무엇이 믿을 만한지를 가리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푸코는 「저자란 무엇인가」에서 저자를 사람이 아니라 기능으로 보았다. 저자라는 이름은 텍스트를 분류하고 규제하고 묶는 담론의 장치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지적한 배치다. 과학에서는 저자 기능이 소거되어, 익명성이 곧 객관성의 보증이 되었다. 누가 말했든 참이면 참이다. 반대로 문학에서는 저자 기능이 강화되어, 이름이 작품의 값을 결정했다.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이 그 소네트의 무게다. 그리고 푸코는 이 저자 기능이 본래 법에서 태어났다고 보았다. 인쇄술이 퍼지고 위험한 말이 돌기 시작했을 때, 그 말에 책임을 묻기 위해, 처벌할 누군가를 특정하기 위해 저자가 필요해졌다. 이름은 영광이기 전에 책임의 표적이었다.

지금 그 배치가 한 바퀴 돌아 뒤집히고 있다.

기계가 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무언가를 답할 때, 그것은 어딘가의 글을 끌어와 종합한다. 끌어온 글이 틀리면 그 틀림이 곧 답의 틀림이 된다. 그래서 기계에게는 출처를 가려낼 동기가 생긴다. 검색 엔진이 굳이 묻지 않던 것을, 답하는 기계는 물어야 한다. 누가 썼는가. 믿을 만한 손을 거쳤는가. 푸코가 과학의 영역에서 소거되었다고 한 저자 기능이, 정보의 영역에서 되살아난다. 정확성을 위해 익명이 미덕이던 자리에, 이제 이름이 다시 들어선다. 익명의 글은 옳더라도 무게를 잃고, 이름 붙은 글은 같은 내용이어도 무게를 얻는다.

이것은 진보의 외양을 한 회귀다. 가장 새로운 기술이, 가장 오래된 물음을 복원한다. 누구의 판본인가. 어느 손을 거쳤는가. 필사실의 물음이 데이터센터에서 되돌아온다. 인터넷이 약속했던 익명의 평등은, 그 평등을 읽어내는 주체가 사람에서 기계로 바뀌는 순간 조용히 철회된다. 기계는 인간보다 더 엄격하게 계보를 따진다. 틀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머지않아 글은 두 번 쓰일 것이다. 한 번은 사람을 위해, 한 번은 기계를 위해. 그리고 기계를 위한 글에는 반드시 이름이 박혀 있어야 한다. 이름이 없는 글은 읽히되 인용되지 않고, 존재하되 신뢰받지 못하는, 그런 자리로 밀려난다.

이 글에는 이름이 없다.


이 글을 두 사람의 대화로 듣는다.